[ 이슬람 제국의 역사,이슬람 제국의 팽창 - 첫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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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

[ 이슬람 제국의 역사,이슬람 제국의 팽창 - 첫 번째 이야기 ]

by 지뇨떄라삐 2022.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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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와 나스르 왕조
맘루크 왕조(1250~1517년)는 살라딘이 사망한 후 아이유브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맘루크 왕조는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로부터 칼리프 칭호를 이양받아, 이슬람 칼리프의 정통을 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노예 용병들이 세운 여러 왕조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독특한 권력 계승 제도를 시행한 왕조로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맘루크 왕조에서는 술탄의 지위가 세습되는 경우보다는 술탄 사후 가장 권력이 센 맘루크들이 자신들 내부에서 한 명의 술탄을 뽑거나 왕위 계승 전을 통해 새로운 술탄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몽골군의 침입을 저지하고 아바스의 후손들로 칼리프를 유지함으로써 이슬람 문화의 명맥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역할을 하였다. 맘루크 예술은 동아시아의 예술 형태와 모티프를 흡수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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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카이로에는 뛰어난 이슬람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맘루크 왕조는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으나, 유럽 각국에서 아시아로 가는 신항로를 발견하면서 중계 무역의 이점이 줄어들고, 내부 분쟁 등으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였다. 이 왕조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1세(재워 1231~1273년)가 13세기 나스르 왕조(1231~1492년)는 아랍계의 나스르족이 스페인 남서부 해안에 세운 왕조로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번성하여 그라나다 왕조라고도 불린다. 나스르 왕조는 주변에 있던 기독교 국가들과 모로코에 있던 이슬람 국가 사이에서 외교술을 발휘하여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이 왕조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1세(재위 1231~1273년)가 13세기 후반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역대의 증축과 개수를 거쳐 완성된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궁전 건축의 최대 걸작이라 할만하다. 나르스 왕조는 무함마드 5세(재위 1362~1391년)가 통치하던 14세기 후반에 가장 번성하였다. 수도 그라나다는 인구가 40여만 명에 이르렀으며, 특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문화와 유럽의 기독교 문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나스르 왕조는 1492년 기독교 국가인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군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오스만 제국
13세기 말 셀주크 튀르크가 몰락하면서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민족들은 크고 작은 공국들로 분열되었다. 그중 하나가 서부 아나톨리아에 근거를 둔 오스만 1세(재위 1299~1326년)가 이끄는 공국이었다. 이들은 셀주크 왕조가 멸망하자 이 지역의 강자로 등장하여,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대륙을 잇는 영토를 확장해 오스만 제국(1281~1924년)을 건설하였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개무역으로 번성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을 이루었으며 이슬람의 예술은 절정기를 맞았다. 무라드 1세(재위 1360~1389년)는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를 만들고, 발칸반도의 아드리아노플로 수도를 옮겨 본격적으로 유럽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정복 활동은 티무르 군대에 의해 잠시 주춤하였다. 티무르 군대는 동쪽으로는 인도의 델리, 북쪽으로는 모스크바, 서쪽으로는 앙카라와 다마스쿠스까지 진군했으며, 1402년 앙카라 부근에서 오스만군을 참패시켰다. 티무르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예술가와 장인을 포함한 사회 상류층에게 자신을 따라 새로운 수도 사마르칸트로 이주하라고 명하였다.

그 결과 티무르 제국(1370~1507년)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면서 세련되고 성숙한 '국제적 이슬람 양식'이 정립되고 전파되었다. 그러나 메메트 2세(재위 1444~1446년, 1451~1481년)는 티무르 군대에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 오스만의 정복 활동을 재개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였다. 이로써 유럽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막아주던 방파제가 무너졌고, 기독교의 상징이었던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고 이슬람의 도시라는 뜻의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독교 성당이었던 성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모스크인 아야소피아로 바꾸고, 톱카프 궁 등을 건설하여 이스탄불에서 이상적인 이슬람 도시의 모습을 실현하려 하였다. 또한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허용하여 공존을 피하였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많은 학자가 그리스, 로마 시대 책과 문화유산을 가지고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르네상스의 발 총에 영향을 주었다. 메메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도 계속 전진하여 다뉴브 강좌에 해에 이르는 발칸 전역을 흡수하고 아시아 쪽으로도 국경을 넓혔다. 메메트의 손자 셀림 1세(재위 1512~1420년) 서아시아로 눈을 돌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였다.

1517년에는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칼리프 지위와 함께 이집트가 가지고 있던 무함마드의 망토와 턱수염 등 성물을 가져와서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이 이슬람 세계의 수장인 칼리프를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1924년 칼리프제가 없어질 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종교와 정치를 대표하는 종주국이 되었다. 이 무렵 페르시아에는 이스마일 1세(재위 1501~1524년)의 영도 아래 사파비 왕(1501~1786년)이 세워져 팽창일로 있었다.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1514년 크게 격돌하였으며, 결과는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만 제국의 절정기는 셀림 1세의 아들 술레이만 1세 (재위 1520~1566년) 때이다. 그는 46년간 재위하면서 13차례 원정을 해동 지중해를 둘러싸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이루었으며, 여러 종교와 인종들을 통치하기 위해 술레이만 법전을 만들었다. 문화와 예술도 번영하여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도 이때 건설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예니체리와 술탄 제도의 문제점 등이 드러나면서 오스만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에서 패하여 유럽의 기독교 승전국들 앞에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임을 상징했던 이슬람 칼리프 제국의 자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국의 분해 과정을 통해 새로운 범이슬람주의가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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