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말기와 근대의 나전 공예 - 두 번째 이야기]와 [한국의 화각 공예 -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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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

[조선시대 말기와 근대의 나전 공예 - 두 번째 이야기]와 [한국의 화각 공예 - 첫 번째 이야기]

by 지뇨떄라삐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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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와 근대의 나전 공예]

특이한 것은 일본인의 작품에서 복고 양식의 사례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형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당시 일본학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던 고대 유물 발굴과 관련해 우리 고대사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진 데 있다. 일본인들은 이 시기에 성립된 왜곡된 역사관이 나전칠기를 포함한 공예품에도 나타나도록 유도하였다.

마지막으로, 선전 공예 부의 주류를 이루었던 작품 경향인 일본 형식이다. 이 형식은 당시의 식민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일본 양식을 따른 것으로 선전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한다. 일본 형식은 일본 기형이나 무늬를 모방하거나 부분적으로 변형을 가해 조선 전통 양식과 절충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공간과 면 분할이 비대칭적인 일본식 장식장 배 구조를 모방하거나, 모모야마시대 이후 크게 유행했던 일본의 전통 무늬인 오동잎 무늬, 수초무늬, 그리고 타원형의 무늬 구성을 차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이 확대된 것은 선전 공예 부의 심사위원이 전부 일본 관전계의 유명 작가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당시의 작가 등용문이었던 조선 미전에서 일본풍의 모방과 아류작 경향을 따르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이었다는 점 등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선전 공예 부를 통해 살펴본 근대 나전 공예의 양상을 정리해본 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창의성이 요구되는 새로운 제작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선시대의 유물을 모방하는 등 관행적인 답습에 그친 전통 형식과 둘째,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공예를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전통 기형에 이를 무리하게 접목한 부조화한 절충 형식, 셋째, 고구려 무용총 벽화고분 등에 표현된 그림이나 낙랑 무늬를 차용한 복고적 형식, 그리고 식민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발적으로 일본 공예의 양식을 따른 일본화 형식이 있다. 한편, 모든 사회적 제반 여건이 일제에 의해 예속되어 타율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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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도 후진 양성과 공예의 진흥을 통해 전통 공예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취지로 공예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27년 전성규에 의해 설립된 나전실업소를 들 수 있다. 전성규는 전승 공예에 가장 혁신적인 공헌을 한 나전장으로 18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한 여 1910년대 초엽부터 본격적으로 나전 기법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8년 나전칠기의 본고장인 통영에 일본인 키무라 체제가 경영하던 통영 칠 기주식회사의 공장장을 지냈으며, 1920년 그의 제자인 송 주안, 김봉룡과 함께 일본에서 제작 활동을 하였다.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져 오는 끊음질 산수 무늬는 그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귀국 후 나전 공예 전문 교육에 힘썼고, 뜻있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서울 소공동에 나전실업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가 세운 나 전실 업소는 설립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운영난으로 폐쇄되었으나 전성규는 이후 1934년 태 천칠 공예소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나전 공예 교육과 보급에 주력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이하 국전)가 창설되면서 새로운 전시 체제가 구축되었다. 초기의 국전 공예는 나전칠기와 자수 등을 주축으로 선전과 같이 수공예 일변도의 제작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국전 중기 이후, 즉 1977년 이후부터 폐막까지 나전 공예는 기계의 도입에 따른 산업의 근대화 탓으로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면 진주패 등 두껍고 큰 자개의 수입에 따라 무늬 도안에 변화가 생긴다. 이는 서양에서 도입된 입식 생활로 인해 가구의 크기가 대형화되면서 그에 비례해 도안의 크기도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나전 공예는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으며, 1962년부터 문화재보호법을 제정 공포한 이래 국가에서 나전 공예 기술을 포함한 전통 공예 기술을 보호 육성하고 있다. 현재는 송 방웅, 이형만 등이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으로서 나전 공예의 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나전 공예의 흐름과 관련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상태여서 그 전승 현황과 무늬의 변화 양상, 양식적 특징에 대해서 언급하기 어렵다. 또한 나전 기술 교육 시설이나 육성 기관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어서 나전 기술의 보전과 계승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화각 공예]
화각은 화각이라고도 하며, 이것을 기물에 붙여 장식하는 것을 화각 공예라고 한다. 화각은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 각지 틀을 만든 다음 그 뒷면에 오방색을 이용한 그림을 그리고 목재로 된 기물의 표면에 접착제로 붙여 치장한 공예품이다. 채색이 각지를 통해 비쳐 보이므로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이러한 채색법은 복채법이라 하는데, 이 기법은 화각 공 예의 기원과 관련되는 동시에 화각의 채색법을 특별하게 하는 중요한 기법이다.

복채 기법이란 대모, 호박, 수정 등 투명성 있는 물체의 뒷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채색한 후에 이를 비춰 보이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러한 복채법의 원리는 고 대 이집트 미라의 관장식에서부터, 중국 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서 동자상을 복제한 유리구슬이 발견되어 원삼국시대부터 이 기법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화에 복채법과 유사한 기법인 설치법이 사용되었고 나전칠기 장식에도 복채법이 활용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도 나전 공예에서 부분적으로 복채법을 사용하고 있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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