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나전 공예 - 세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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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

[조선시대의 나전 공예 - 세 번째 이야기]

by 지뇨떄라삐 2022.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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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품들은 제작 기법이나 무늬, 양식에서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종은 특수한 목적이나 제한적 기능을 지니는 것에 한정되며, 목심은 견고한 짜임으로 정성들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결구를 보강해주는 거멀이나 모 싸개 장식, 형태를 고정하기 위한 못 등을 별도로 쓰지 않았다. 둘째, 고려시대 이래 전통적인 무늬의 소재였던 모란 넝쿨무늬를 기면 전체에 포치하여 무늬 구성면에서 균형과 통일감을 유지하는 등 조선시대 초 중기의 특징이 일부 유지된다. 또한 고려시대 경함에서 쓰였던 동선을 넝쿨 줄기나 봉황의 꼬리깃 및 구획선 등에 계속 사용하고 있다. 셋째, 재료를 엄선하여 빛깔이 고운 양질의 자개를 사용하였으며, 자개를 붙일 때 결까지 고려하였기 때문에 자개 빛과 반사에 따른 장식 효과가 높다. 이와 상대적인 개념으로 18세기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나전칠기의 수요 계층인 서민의 취향을 반영하는 민수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전으로 장식하는 기물이 일상 용기에까지 확대되어 연상, 각종 함 류는 물론 자, 실패, 반짇고리, 가께수리, 베갯모 등에도 널리 적용된다. 그리고 목심을 제작할 때 짜임을 하지 않고 판재를 서로 잇대어 못질하였기 때문에 구조가 엉성하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거멀 이나 귀 모 싸개 장식 및 자물쇠 바탕 등을 과다하게 사용하여 기형과 무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둘째, 화보 풍의 새와 꽃무늬 등 사실적인 무늬가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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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선 시대 말기 회화에 많이 보이는 화보 풍 그림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화보에 실려 있는 각각의 소재들은 모두 개별적인 무늬의 생 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전 공예 무늬의 모본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기복적 성격을 땐 십장생 쌍학천도 칠보 구 봉채 문자 등의 길상무늬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 무늬들은 모두 일반 서민층의 소망 과기원을 담고 있다는 점이 공통이다. 길상무늬는 17, 18세기에 그 전통이 형성되었고, 단독으로 시문 되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무늬와 함께 시문되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길상무늬가 출현하는 초기 단계에는 화조무늬의 보조 무늬로 사용되다가 후에 화조무늬가 점차 약화하면서 중심 무늬로 자리를 잡게 된다. 길상무늬의 대표적인 예는 십장생무늬이다. 십장생은 서민적인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18~19세기의 작품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전성기에는 끊음질 기법의 기하학적 무늬를 배경으로 십장생을 시문 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원래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사슴, 불로초, 거북, 학의 열 가지를 일컫는 말이지만 무늬로 도안할 때는 일부 요소만을 발췌하여 한 장면을 묘사하듯이 표현한다. 십장생의 개별 요소들이 조합을 이룬 대표적인 형식으로는 사슴 불로초 소나무의 조합, 봉황 오동나무의 조합, 학 소나무 또는 대나무의 조합을 꼽을 수 있다. 넷째, 여백 없이 나전을 빽빽하게 기면 전체에 붙여 화려하게 장식하는 시 문형식이 출현한다. 이는 왕조의 말기적인 형식화의 경향과 함께, 개항 전후에 활발하게 유입되었던 청대 문물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후기 나전 칠기를 비롯한 공예 전반의 변화를 야기시킨 상공업의 발달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제적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개시 무역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강후시 책문후시 등 후시 무역으로 바뀌어 민간 상인의 주도 아래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과의 왜관 무역에 한정되었던 조선시대 초기와는 달리 동래상인 등을 중심으로 사무역이 성행하였다. 이처럼 민간 상인들에 의한 대외 무역이 성행하자 국내 상업계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시대 전반까지 생산 체제의 중심을 이루어왔던 관영 수공업이 붕괴하고 민간 수공업 체제가 형성됨에 따라 상업 발달이 가속화되었다. 이런 원인으로 나전 공예품 제조 역시 관영 수 공업 체제가 완전하게 유지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 초엽의 기록들에서 통영과 전주를 나전칠기의 명산지로 들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경공장에 의해 서울에서만 제작되었던 나전 칠기가 이 시기에 지방에서 제작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관련 문헌 기록이나 작품의 양식적인 특징을 고려할 때, 나전 공예가 지방에서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관영 수공업 체제가 붕괴하자 장인들은 민간수공 업장에서 민수품을 만들어 수요자에게 직매하거나 시장 상인들에게 도매하는 데 주력하였고 이때부터는 관청에서도 필요한 물품을 시전을 통해 구입하게 되었다. 상공업의 발전과 신흥 부유층의 성립은 이 무렵의 고급 공예품이 확산되는데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들 신흥 부유층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상충 문화를 향유함으로써 계층 간의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그동안 왕실이나 특정 계층만이 독점적으로 사용하였던 나전칠기 등의 고급 공예품을 구매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일반 서민층에 널리 애창되었던 민요, 판소리의 내용 속에 나전칠기 등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봉산탈춤' '동래야류 '성주풀이 등의 가사뿐 아니라 어청도분출의 민요인 '범벅타령 호사스러운 치레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자개 합동 등이 빈번하게 열거된다. 조선 후기의 나전칠기 공예는 상공업의 발전에 따른 수요층의 확대로 관 영 수공업 체제에 의존하던 조선시대 초 중기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나전 공예품의 종류를 비롯하여 무늬의 구성이나, 내용, 그리고 양식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근대화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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